"BACH ist Anfang und Ende aller Musik" - Max Reger
바흐는 음악의 처음이자 마지막 - 막스 레거
"BACH ist der Urvater der Harmonie. “ – Ludwig van Beethoven
바흐는 화성의 조상 - 루드비히 판 베토벤
안녕하세요 클래식:을 듣다 입니다.
클래식에 관한 글은 적은 후 처음으로 다룰 주제를 많이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선택하였는데,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셨던 이름이지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독일의 작곡가이자 교회음악가이며 (Kantor(독), Cantor(영)), 바이올린과 오르간, 그리고 쳄발로의 뛰어난 연주자이면서, 수석바이올린리스트로, 지휘자로써 활동하였습니다. 한 시대를 휘황찬란하게 살아가며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던 음악가로 생각하실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바흐가 살았던 시대에서는 바흐는 이른바 '존재감 없는' 음악가였습니다. 당연히 지금의 시각에서 봐도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그의 삶은 평생 이리 치이며 저리 치이며 힘들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는 1685년 3월 21일 독일 중부에 위치한 튀링겐 (Thüringen)이라는 주에 위치한 아이제나흐 (Eisenach)라는 도시에서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불행히도 1694년, 1695년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잃고 고아가 된 바흐는 자신의 형이 (Johann Christoph Bach)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고 있는 오르드루프 (Ohrdruf)라는 곳으로 가서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북독일 그리고 하인! 생활
14세가 되는 해 바흐는 동창생과 같이 뤼네부르크 (Lüneburg)이라는 당시 큰 북독일 도시로 가서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게 됩니다. 거기서 바흐는 게오륵 뵘 (Georg Böhm)이라는 작곡가에게 레슨을 받았고 다른 유명한 작곡가 북스테후데 (Dieterich Buxtehude), 라인켄 (Johann Adam Reincken) 들의 곡들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학교생활을 끝낸 바흐는 금전적인 이유로 다시 중부독일로 돌아오게 되고, 1703년 바이마 (Weimar)라는 작은 도시에서 바이올린리스트 겸 하인으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음악가 생활
1703년 바흐는 드디어 아른슈타트 (Arnstadt)라는 도시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합창단까지 맡게 됩니다. 당시 바흐는 50 굴덴 (Gulden (당시 통화))을 연봉으로 받았는데, 이는 현재 환화로 약 3150 유로에 (한화로 대략 420만 원) 해당합니다. 1707년 또다시 입사시험을 보고 뮐하우젠 (Mühlhausen)이라는 도시에 오르가니스트로 옮겨가게 되고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 (Maria Barbara)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녀와 7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게 됩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바흐는 보수를 좀 더 올려서 다시 바이마 (Weimar)라는 도시로 궁정 오르가니스트 겸 실내악 연주자로 재직하게 됩니다. 더불어 1714년부터는 수석바이올린리스트라는 호칭을 받으며 많은 작곡활동과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1717년에는 지휘자로 (Kapellmeister(독)) 쾨텐 (Köthen)이라는 도시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이 도시에서 바흐는 전 부인의 죽음으로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Anna Magdalena)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토마스 칸토어 Thomaskantor
1723년 2월 7일 바흐는 자신이 쓴 두곡의 칸타타 „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 “ BWV 22와 „Du wahrer Gott und Davids Sohn “ BWV 23를 가지고 입사시험을 본 뒤 라이프치히 (Leipzig) 도시에 있는 토마스 교회 (Thomaskirche) 교회음악가(Kantor (독)) 가 됩니다.
당시 토마스 교회는 바흐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취업공고가 나가고 3명의 음악가를 후보자로 뽑았는데, 바흐는 후보자로 뽑히지도 않았습니다. 3명의 후보 중 시험을 통해 당시 유명하고 잘 나가던 북독일 대도시 함부륵 (Hamburg)에서 시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던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을 뽑았으나, 함부륵 (Hamburg) 시에서 월급을 올려가며 텔레만을 못 가게 붙잡아뒀습니다. 그리하여 2번째 공고가 다시 나가고 바흐를 비롯한 4명의 후보자가 시험을 쳤는데, 다름슈타트 (Darmstadt) 도시에서 활동하던 지휘자였던 그라우프너 (Christoph Graupner (1683-1760))을 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름슈타트 (Darmstadt)가 속한 헤센 (Hessen) 주의 태수가 그를 놓아주는 것을 거절하여서 또다시 무산되고 맙니다. 그러고 나서 할 수 없이 라이프치히 (Leipzig) 시에서는 바흐를 3번째 주자로 임명하는데 선발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Da man nun die Besten nicht bekommen könne, so müsse man mittlere nehmen “
"최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범한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흐는 그의 실력에 걸맞지 못한 처우를 받음에도 토마스 칸토어 (Kantor)로 취임을 하게 됩니다. 1750년 바흐가 죽기 전까지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매주 매주 작곡한 그의 칸타타와 최고 수준의 수많은 예술 작품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기에도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발견된 바흐의 작품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곡들은 음악가들과 청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잃어버릴 수 있었는데, 천만 다행히 바흐의 Matthäuspassion (마태수난곡)이 초연 연주 (1727년)가 100년이 지난쯤인 1829년 3월 11일, 20살에(!) 불과한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에 의해 다시 연주가 되었고 바흐의 진수가 다시금 울리게 됩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우리가 듣고 있던 바흐 음악, 다시 한번 되새기는 마음으로 들어야 될 거 같습니다.
바흐는 다루기에 많은 내용을 다뤄야 하기에, 기회가 될 때 자세하게 몇 회로 나눠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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